라이프로그


선빵’ 대화(對話)를 날리시죠

 

공동체를 원하신다면

공동체 삶에 대한 언급이 점차 늘고 있다. 아예 공동체 혹은 코뮨이란 이름을 달고 일상을 영위하는 곳도 생기고 있다. 그에 대한 이론도 늘뿐 아니라 정교해지고 있다. 그런 현상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가 공동체와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와 비슷한 말에 속하는 고장, 마을, 동네 등의 단어는 사라지거나 혹은 그 함의를 바꾼 채 존재하고 있다. 고장이란 말은 사라진 듯하고, 동네란 말 속엔 ‘잠자는 곳’ 정도의 함의만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결핍된 것에 대한 욕망의 결과로 우리는 오매불망 건강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갈구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한국 사회보다 더 하진 않겠지만 대체로 많은 나라들에서 이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다. 사회가 선진 제도를 갖춘다 하더라도 과거보다 그 운용이 원활치 않음을 경험하고 있다.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상에 담긴 문화가 문제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전에 비해 이웃한 사람들끼리 동네 걱정을 나누는 일이 줄고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최소한으로 이웃을 사귀고 당장의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 외면해버리는 개인주의적 습속이 주요 일상으로 자리잡았음을 아쉬워한다. 공동체는 놓친 것을 아쉬워하는 향수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의 삶을 윤택하거나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의 문제인 셈이다.

로버트 퍼트남은 <나홀로 보울링>이란 책을 통해 공동체 문제가 현실 문제임을 여실히 드러내고자 했다. 미국의 마을 어귀에 있던 보울링장은 늘 사람들로 붐비던 편리한 사교장이었다. 공을 굴리고 맥주를 나누며 마을 걱정도 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곳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보울링의 인기는 전만 못하다. 뿐만 아니라 혼자 보울링 치는 사람도 늘었다. 퍼트남은 이 같은 현상을 ‘사회적 자본’의 감소라고 보았다. 널리 사람을 알아 생활을 도모하는 일이 줄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지탱해주던 힘이 동네 이웃 간의 신뢰, 협조였고 큰 사회적 자본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사회의 침체는 경제나 정치 제도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제도가 원활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자본이 감소했음에 원인이 있다고 퍼트남은 보았다.

퍼트남이 강조한 사회적 자본의 기본 바탕은 신뢰와 호혜성이다. 이웃 간에 신뢰가 쌓이면 서로 혜택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고 그럼으로써 서로 돕기 위한 실천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그 실천이 거듭되면 자연스레 사회적 자본이 쌓인다. 그를 통해 진정한 공동체라는 범주가 가시화될 수 있다. 공동체 형성을 위해선 신뢰와 호혜성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접하고 나면 그 다음엔 신뢰와 호혜성을 길러내기 위한 방법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마련이다. 퍼트남이 보울링장에 주목했던 것은 그곳에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말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공간이다.

퍼트남은 텔레비전을 보울링장의 천적으로 삼기도 했다. 나홀로 텔레비전 보기가 너무 재미있어 보울링장 출입이 줄고, 그로 인해 대화가 실종되고, 신뢰와 호혜성이 전에 비해 위축되고 공동체가 흔들거릴 수도 있다는 가설적 주장도 내놓았다. 공동체 주장은 늘 ‘대화’를 앞 세운다. 공화주의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공화주의적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내세운 것도 대화(소통) 행위였다.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사회를 극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으로 대화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은 대화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까지 했다.

‘선빵’ 대화를 날리시죠

텔레비전 등과 같은 대중매체가 대화를 방해하거나 공동체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리면서 전에 없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소셜 미디어라 불리는 SNS(Social Network Service)에 대한 언급이 늘고 있다. 보울링장 같지는 않지만 줄어든 대화를 트윗터나 페이스 북 등이 만회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늘고 있다. SNS가 누리고 있는 선풍적 인기를 보자면 그런 믿음이 허황되지만은 않다. 전혀 새로운 종류의 재미를 선사하며 으뜸 소통 매체로 우뚝 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퍼트남이 그런 매체를 적시하지 않았음에도 유난히 그의 저서와 논문이 많이 언급되는 것도 새로운 매체에 대한 믿음, 기대 때문일 거라 짐작이 된다.

정말 그럴까. 실종되었거나 약화된 공동체에 그들이 대화를 선사해서 신뢰와 호혜성이 충만하게 해줄 수 있을까. 자신이 포함된 집단이나 조직이 약한 공동체라 생각하는 이에겐 소중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공동체라 부르면서도 어느 곳 보다 공동체 의식이 뒤진다고 믿는 집단, 조직에게도 이는 부여안아야할 묵직한 질문이다. 아직 공동체를 이끌 확실한 수단을 가지지 못한 집단이나 조직으로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인터넷 등장 이후로 게시판, 카페 등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쌓아오긴 했지만 썩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더 절실한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SNS는 양질의 대화를 더 빈번하게 오가게 해주는 계기가 될까.

답은 이렇다, 누가 어떻게 그 수단을 이끌고 가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SNS는 대체로 쌍방적이고 즉각적이며, 자유로운 소통을 하도록 만들어 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통해 이뤄지는 대화가 반드시 쌍방적이고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을 띤다고 보장할 순 없다. SNS를 이용하는 참여자의 행태에 따라 성격이 정해질 뿐이다. 한국 네티즌의 인터넷 사용은 검색보다는 토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이나 서구의 경우 그와는 반대로 검색 사용이 더 앞선다. 이것이 곧 인터넷 문화의 차이인데 그 차이는 결국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 골을 파놓는가로 정해진다. SNS를 공동체적 방향으로 이끄는 사람이 늘고, 그들 간 협력이 이뤄지면 공동체에 합당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은 뻔하다. 어떤 이를 두고 ‘선빵’을 누가 날리는가에 따라 특정 공간의 성격은 정해지는 거라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진정한 공동체 형성에 대한 열망이 크다면 더 많이 대화하고, 신뢰를 구축하고 호혜성을 실천할 일이다. 그럴 통로가 없어 고민이었다면 새롭게 등장한 좋은 조건의 SNS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다. 공동체에 대해 더 많은 열망을 가진 이들이 협력적으로 ‘선빵’을 날린다면 열망을 현실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공동체 형성에 목말라 해왔던 조직, 집단으로선 전에 없이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일 수도 있다. 아직은 누구도 ‘선빵’을 날리지 않은 상태이니 열망하는 이들의 기를 협력적으로 모아 제대로 한번 밀어붙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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