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은 수원에서 태어났다. 집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 수원시 화성행궁 근처로 추정된다. 생가터 비석은 신풍초등 후문쪽에 세워져 있다. 나혜석이 수원에 몇 살까지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진명고녀 진학 전까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사촌 오빠인 나중석 등이 세운 삼일학교 (지금의 삼일정보학교 등)에 다녔고, 이후 서울로 진학한다. 나혜석의 동상이 수원시 인계동 근방에 세워졌고 나혜석 거리도 근방에 있지만 지리상 그곳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혜석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한 모던걸이 고장을 대표해 기념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매년 4월이면 나혜석을 기념하는 축제가 수원에서 열린다. 올해가 3회째인데 아직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축제를 벌이지만 그의 아버지의 친일행적, 그의 남편의 친일행적 등을 내세워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또 여성인 관계로 여성성이란 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겠는데 도대체 지역행사에서 여성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고 또 기억하고 있을까 등등은 중요한 문제다.
수원에서 축제를 대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수원은 수원에 어떤 행적도 남기지 않은 이 화가, 작가를 기념하려 할까? 그리고 축제는 도대체 지금 수원시민에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수원시는 45억 정도를 확보해 그의 생가를 복원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건 정당한 일일까? 등등을 고민해보려 한다. 그래서 우선 그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해보기로 했다.
나혜석-나경석-배숙영 : 경석은 혜석의 친오빠다. 일본 유학을 같이 했고, 경석은 나중까지 혜석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배숙영은 경석의 아내인데 올케로서 혜석의 말년에 도움을 주었다. 나경석과 배숙영 사이에서 난 나영균(이화여대 영문과 명예교수)이 고모와 그의 가족을 회상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나혜석-김우영 : 김우영은 동래 사람으로 교토대학법학부를 나온 변호사.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지만 장남은 어릴 때 사망한다. 김우영과 결혼 후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최린을 만나 연애를 하였고 이를 알게된 김우영은 이혼을 요청한다. 김우영과의 이혼 후 나혜석은 최린에 기대려 하지만 최린은 별다른 도움을 주질 않았고, 이후 나혜석은 수원, 수덕사 부근의 수덕여관에서 지내지만 고독과 병고에 시달린다. 아들 중 김진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막내 김건은 한국은행총재를 지낸다. 김진은 어머니와 관련된 책을 내지만 주 내용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다.
나혜석 - 최소월(최승구) - 최승만 : 나혜석은 일본에서 천재시인이라 알려진 최소월과 첫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그의 오빠 나경석이 소개한다. 나혜석이 일본 유학 당시 이광수와 염문이 있었다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최소월은 유학 중 폐병으로 귀국하고 나혜석이 고창으로 그를 병문안하지만 곧 숨을 거둔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하는 전제조건에 그의 첫사랑 산소를 방문하고 비석을 세울 것을 담았다고 한다. 그의 산소와 비석은 현재 찾을 길이 없다. 최소월의 형님은 최승만인데 그는 오빠 나경석과 친구이기도 하다. 최승만은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일장기 말소사건에 말려 옥고를 치른다.
나혜석과 김일엽 : 김일엽은 수덕사 승려로 입적하기 전까지 수 많은 염문을 뿌리던 모던 걸이었다. 나혜석은 이혼 후 김일엽처럼 승적에 들기 위해 수덕사를 방문하지만 수덕사에 들지 못하고 수덕여관에만 머문다. 만공스님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일엽은 나혜석에겐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김일엽에겐 일본인 사이에 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일당 김태신이다. 김태신은 어린 시절 어머니 일엽이 그리워 수덕사를 방문하지만 만나지는 못한다. 그 그리움을 나혜석이 대신 달래준다. 김태신은 나이 60이 넘어 승려가 되는데 나혜석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그림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다. 그는 김은호 화백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있었고 북한 주석궁에 있는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은 김천 직지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화가다.
나혜석 - 이응로 : 나혜석의 그림에 부러움을 느끼고, 파리를 동경하던 이응로는 수덕여관으로 나혜석을 찾는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고 자신이 파리로 떠나면서 그는 첫 부인 박귀희에게 수덕여관을 운영케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알려진 수덕여관의 최후 운영자는 박귀희였던 셈이다. 이응로는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다음 수덕여관 뒤편 바위에 작품을 남겨두었다. 박귀희는 이응로를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부인인 박인경과 살기 위해 다시 파리로 떠난다. 박인경은 대학시절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던 안양의 경성 보육원을 방문했다 우연히 나혜석을 만난다. 이미 병색이 완연했던 나혜석은 그림과 일기를 박인경에게 보여주었다 한다.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나혜석 - 김원봉 : 이후 북한의 노동상이 된 약수 김원봉은 중앙중학시절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의 학생이었다. 담임선생이던 나경석을 따르던 김원봉은 여러 차례 수원을 방문해 나혜석과 만나고 같이 독서한 책을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나혜석이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있었을 때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던 김원봉을 만나고 김원봉의 국내 작전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혜석 - 나기원, 나기형, 나기정 : 나기정은 나혜석의 아버지다. 용인군수를 지냈고 이후 일본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나기원과 나기형은 나기정의 형제들이다. 이중 나기원은 수원 근방의 봉담에서 농토를 나누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기원의 아들 나중석(나혜석의 사촌 오빠)은 수원의 삼일학원을 세운다.
덧글
서정일 2011/04/30 23:01 # 삭제 답글
나혜석과 행궁동에 대한 해석이며
나혜석과 수원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김미진 2011/05/06 12:00 # 삭제 답글
성열 2013/04/27 10:56 # 삭제 답글
유현 2013/12/03 21:01 # 삭제 답글
나해석 2015/04/23 07:50 # 삭제 답글
나해석 2015/04/23 07:50 # 삭제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