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담론의 러쉬였다. 임수경 의원의 대 탈북자 ‘막말’과 사과가 가장 앞 줄에 서 있었다. 이어 탈북자실향민중앙협의회가 새누리당의 조명철 의원을 경찰 수사 의뢰한 사건도 생겼다. 탈북자를 대표할 자격이 없는 자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 조명철 의원과 황우여 의원은 박원순 시장이 탈북단체를 홀대한다는 성명을 낸다. 태국 대사관 사건에 당황한 외교부는 현지조사단을 파견했다. 로버트 킹 미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중국 내 탈북자들의 인권문제를 들고 나왔다.
보름간의 탈북자 끝말잇기 탓에 탈북자는 사회 무대 위로 올랐고, 그들의 목소리가 대중의 귓불을 스치기 시작했다. 탈북자가 2만 4000여명에 달한다는 사실, 탈북자 관련 NGO들이 도처에 있으나 여전히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진다. 남쪽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3국으로 이주를 꿈꾸는 이들이 많음도 알게 되었다. 호사를 누리는 탈북자도 있고, 탈북자 루트가 있으며, 외교 마찰까지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대중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보름의 풍성한 탈북자 정보는 투명인간을 보이게 했고, 그들 존재에 이러저러한 말을 보태는 사건을 만들어냈다.
지난 보름이라는 국면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 보름 간 이어진 탈북자 국면은 임수경 의원에 분노하고 홀대에 항의하는 탈북자들의 적극적 노력이 만든 결과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을 대의하고 활용하는 쪽의 노력 탓이 더 컸다. 외교부가 격분해서 나서고, 새누리당이 거당적으로 들고 일어서고, 미국이 중국 내 인권문제를 들고 나서고, 보수 언론이 북한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등의 회오리 효과가 있었다. 종북 담론이 시들해지기 전에 탈북 담론을 이어졌고, 그게 지난 보름 동안 우리 앞에 다가온 담론 러쉬였다. 그런 점에서 탈북자 담론은 특정 블록이 형성한 정치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탈북자들은 참으로 많은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었다.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탈북자란 공식적 호명 외에도 보호대상으로, 때론 국제적 난민으로 불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명명하지 못하고 늘 외부로부터 그렇게 불리며 대의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민주주의가 충만한 곳으로 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민주주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대상화, 객체화되고 있었다. 스스로의 이름 짓지 못하고 남이 붙여준 이름으로만 살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자신들의 처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주체가 불러주는 호명에 대답하며 살고 있었다.
보수 세력에 의해 대의된다는 이유만으로 탈북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민주주의 사회를 운위했던 탈북자들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고민해보는 것을 미뤄서는 안될 일이다. 자신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로 대표할 준비. 자신들안 차이를 확인하는 일. 같은 공간 내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 그런 일들이 곧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지난 보름 동안 넘치는 탈북자 담론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사안이었으면도 고스란히 생략된 이야기들이었다.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비민주적 담론이 만개한 지난 보름은 탈북자를 제대로 고민하기엔 참담한 시기였다.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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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2012/06/22 14:1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통일염원 2012/06/29 18:41 # 삭제 답글
더러운 세상 2016/02/18 15:33 # 삭제 답글
더러운 세상 2016/03/17 14:26 # 삭제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