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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왓킨스, 박유하

왓킨스의 <요코 이야기>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엉뚱한 관계로 만든다. 요코가 조선 땅에 와 있었던 것 자체가 식민정책 때문이다. 요코의 아빠의 직업이 무엇이었던 것과 관계없이 요코는 일본의 식민 정책 때문에 아빠를 따라 한반도의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책이 실패로 끝나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한반도에서의 그의 운명은 철저하게 식민 정책과 관계있으며 그 결과다. 그를 부정할 순 없다. 그렇다면 그가 겪었던 한반도에서의 많은 일들도 그로부터 자유스럽지 않으리라.

 

북쪽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벌어졌던 많은 고통 또한 일본의 식민 정책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다. 애초 그게 없었으면 요코는 책에서 보았던 것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코는 이상한 인과론을 내놓는다. 결과를 키워 이야기하면서 원인을 축소하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요코가 경험했던 성폭력 위협이 있었다는 것이 책의 주요 골자다. 왜냐하면 왓킨스가 인터뷰에서 늘 밝히듯이 그의 책은 전쟁에서의 고통에 대한 내용이 주 골자다, 그래서 자신을 평화주의자라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애초 전쟁이 왜 생겼을까를 더 했어야 옳다. 원인을 빼놓고, 전쟁 중에 생긴 일을 키워서 말함으로써 ..

 

왓킨스의 경향은 박유하의 위안부 이야기하기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소녀가 아닌 위안부, 로맨스에 빠진 위안부, 가끔씩은 인생을 즐기는 위안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식민 정책이 존재했고, 그것이 갖는 권력 탓에 위안부가 되어야 한 인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덮지는 못한다. 강한 민족주의가 자아낸 문제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특이적 결과 몇몇으로 원인을 지워서는 안될 일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똑 같은 언법이 발견된다. 식민이 존재하고 여러 식민 생활이 뒤 따랐다는 언법이 아니라, 수탈론에서 제기한 것과는 다른 특이 생활들이 존재했다며 아예 수탈 정책 자체를 묻어두려 한다.

 

가족적 유사성이란 용어가 있다. 가족 개개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 용모 등을 지닌다. 모두가 일란성 쌍둥이가 아닌 한 가족 개개인은 특이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가족을 한 데 모아 찬찬히 뜯어보면 어딘가 닮은 곳들이 존재한다. 각기 특이하지만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가 가족적 유사성이다. 스포츠를 예로 들어보자. 농구는 자신만의 독특한 룰을 가지고 있다. 한 골에 2점씩 기록하니 다른 것과 차별성을 가진다고 할 수 밖에. 핸드볼은 발로 차선 안되고 한 골에 한 점씩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인원수가 벌이는 그만의 독특한 룰을 가지고 있다. 탁구와도 다르고, 축구와도 다르다. 그러나 그 운동 경기 대부분은 가족적 유사성이랄 만한 공통점을 지닌다. 점수를 많이 내는 쪽이 이긴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르면서 닮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용어일 것이다.

 

식민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경험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수탈론, 민족주의 사관은 그 다양한 경험들을 통제했다, 언제나 일반론으로 이야기를 펼쳤다. 일본은 한국을 등쳤고, 수탈했고, 겁탈했으며 모든 것을 뺏아갔다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펴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경험을 내세운 새로운 주장들이 등장하고 당황하게 된다. 식민 기간에도 애정은 늘 꽃 히고 있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식민지 교육의 줄을 타고 큰 부를 일구었고, 식민 행정에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전에 비해 질병 피해를 덜 받게 되고 등등. 전에 없는 다양한 경험들이 등장하자 일괴암적이던 식민지 담론은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각기 달라보이는 삶이었더라도 그 삶은 궁극적으로 결정지워주엇던 것은 식민이라는 조건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무리 달라 보여도, 특이해보여도 결국 그 일이 있게 만든 최종 심급은 식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작은 이야기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양한 삶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역사 적기에 대해 특별한 반감을 가지고 있진 않다. 오히려 새로운 역사 적기라는 점에서 거대 서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편이다. 그러나 종종 포스트 주의 담론에서 찾을 수 있듯이 특이, 특수가 거대 서사에 도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스스로 거대 서사의 자리에 올라서는 위험에 대해선 경계하려 한다. 왓킨스는 요코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키워 이야기하고 그것을 전쟁이 주는 상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이전의 식민, 전쟁으로 인한 한반도의 상처에 대해선 눈을 감는다. 박유하가 위안부를 설명하고, 정대협을 말하려는 방식도 유사해 보인다.

 

일본 리츠메이간 대학에서 721릴에 왓킨스의 책을 두고 <패전, 인양, 성폭력>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한다고 발표했다. 심포지엄을 소개하면서 논의를 <종군위안부문제>로 까지 연결시키려 하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강연자 중 한 사람이 박유하 교수다. 정말 위에 언급한 방식의 논의로부터 벗어나는 이야기들을 할까?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교 시내 캠퍼스 213호실.

2014721, 14:00 -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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